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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애왕태후(獻哀王太后, 964년~1029년)는 고려의 5대 왕 경종(景宗)의 세번째 왕비(王妃)이다. 7대 왕 목종(穆宗)의 모후로, 태조의 아들인 대종과 선의태후에서 출생하였다. 시호로는 응천계성정덕왕태후(應天啓聖靜德王太后)라 하며 흔히 천추태후(千秋太后)라고도 한다.

생애[]

태조의 아들인 추존왕 대종(戴宗)의 딸로, 경종(景宗)의 제3비 황후이자, 목종(穆宗)의 어머니이며, 성종(成宗)의 누이동생이고, 현종의 모후 헌정왕후(獻貞王太后)의 언니이다. 오빠인 성종과는 달리 헌애왕후와 헌정왕후는 부모의 성인 왕씨(王氏)나 유씨(柳氏)가 아니라, 왕실의 풍습규율에 따라 할머니인 고려 태조 왕건의 제4비 신정왕후 황보씨(神靜王太后 皇甫氏)의 성을 따른다.

981년 남편인 경종(景宗)이 죽자 아직 2살이던 헌애왕태후의 아들 왕송(王訟) 대신 왕후의 오빠인 황주원군 왕치(王治, 성종)가 즉위하게 되고, 헌애왕태후는 태후가 되어 천추궁(千秋宮)에 머물렀다. 성종이 죽은 후 아들 개령원군(開寧院君) 왕송(목종)이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여 스스로 천추궁에서 사는 자신을 가리켜 천추왕태후(千秋王太后)로 부르게 하였다.

한편 그녀는 경종이 죽은 후 외가의 친척인 김치양(金致陽)을 만나 통정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공공연히 알려져 궁궐에 분란을 일으키자 왕후의 오빠 성종은 김치양을 귀양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그러나 천추태후는 섭정을 시작하자, 김치양을 다시 불러 우복야삼사사(당시 재정권과 인사권을 동시에 담당하던 직책)에 임명시키고 막대한 권력을 수여하었다. 성종은 고려 전통의 불교의식으로 여겨져왔던 국가행사인 연등회, 팔관회는 호국의 뜻과 명복을 비는 행사를 "팔관회 잡기들이 떳떳하지 못하고 또 번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폐지시켰다. 하지만, 천추황태후는 성종태황제 때 외면받아 차칫 유교적 정치이념아래에 고려국의 정체성을 잃어버릴뻔했던 고려전통의식들을 전부 부활시켰다.

천추태후는 대고구려제국을 꿈꾸었던 고려의 시조인 태조 왕건의 정신을 이어받고자 하였다. 이는 곧 서경(지금의 북한의 평안도의 평양특별시이자 태조 왕건이 북진 정책으로 제2의 수도로 삼았던 도시)중시 정책으로 이어졌는데, 서경을 호경(제2의 수도)으로 개칭하였다. 중국의 측천무후가 호경을 중심으로 주나라를 통일하였듯이, 이는 곧 서경을 강화하여 고려를 다시 일으키겠다는 정신이 담겨져 있었다.

천추태후는 권력과 욕망의 화신이 아닌 무엇보다 외교정책에 있어서는 서희(본명 서염윤) 못지 않은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한 여성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고려는 대고구려제국을 꿈꾸면서 안으로는 영토회복의 꿈을 키우면서 동북아시아 국제정세에 민첩하게 대응하였고, 그 결과 한 번도 외세의 침입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명분이 아닌 고려의 안정을 최우선 목표로 정하면서 대요국와 북송국 사이에서 현실적인 실리외교정책을 펼쳐나아갔다.

그리고, 그 후 고려 목종 5년 재위중에 거란으로부터 공신호를 수여받았는데, 당시 고려사절요에서는 "거란이 야율연귀를 보내와 왕을 올려 책봉하여 수의보방추성봉성 공신으로 삼았다"라고 기록했다. 이는 곧 신흥세력인 거란이 세운 대요국과 우호적관계를 유지함으로써 북방의 안정을 추구하는 실리적 선택을 하였다.

그리고, 북송과의 외교관계는 일정중립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북송사에서는 "고려 목종은 북송 황제에게 송의 군사를 국경에 주둔하여 거란군을 견제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는 고려와 북송의 외교관계가 수립되면 거란군사들이 쳐들어올 것이 뻔한데 그렇지 않을 수 있는 북송이 거란군을 확실히 제압할 수 있는 군사력을 가지고 있다는 힘을 보여주면 외교관계를 맺겠다는 것으로 요청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1003년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정을 통하던 끝에 둘 사이에서 아이가 출생하자, 이 아들로 하여금 병이 든 목종의 후사를 잇고자 했다. 이를 위해 즉위에 걸림돌이 되던 대량원군 왕순(大良院君 王詢, 후일 현종)을 죽이고자 시도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결국, 강조의 변이 일어나 김치양은 목숨을 잃었고, 천추왕태후는 유배를 갔으며, 목종은 폐위되어 유폐지로 향하는 도중 강조의 부하들에 의해 암살당하고 말았다. 이로써 1009년 천추태후는 고려 정치 일계에서 완전히 실각하였다. 한편, 강조 등은 대량원군 왕순을 왕위에 추대하였는데 이 사람이 바로 고려 현종이다. 천추왕태후는 유배에서 풀려났고 황주에서 살다가, 현종 20년 정월에 왕궁으로 돌아와 66세를 일기로 개경 숭덕궁에서 자유롭고 당당했으며, 고려의 운명을 짊어졌던 여성 정치가로서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했다. 묘는 유릉(幽陵).

참고로, 선왕(先王)인 경종과는 사촌지간이 된다.(친남매 사이로서 삼국 시대로부터 전해오는 근친혼례방식을 취함)

가족관계[]

  • 아버지: 고려 태조 왕건 장남 추존왕, 대종 왕욱(戴宗 王旭, ?~969)
  • 어머니: 선의왕후 유씨(宣義王后 柳氏)
    • 오빠: 고려 제 6대 왕 성종(成宗, 960~997)
    • 여동생: 현종의 모후 헌정왕후(獻貞王后)
      • 조카: 제 8대 왕 현종(顯宗)
  • 남편: 고려 제 5대 왕 경종(景宗, 955~981)
    • 맏아들: 고려 제 7대 왕 목종(穆宗, 980~1009)
  • 정부(情夫): 김치양(金致陽)
    • 둘째 아들: 1006년 출생하였으나, 이름은 알 수 없으며 훗날 서북면도순검사 강조에게 피살됨.

같이 보기[]

  • 강조의 변
  • 고려-거란 전쟁

헌애왕후를 연기한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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